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문단 편집) === 사할린부대에 대한 강제 무장해제 === [[파일:external/pds20.egloos.com/f0020275_4c6a37c6ba86f.gif]] 자유시 사변 현장 약도. (출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81500209207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8-15&officeId=00020&pageNo=7&printNo=20884&publishType=00020|1989년 8월 15일 동아일보]]) --[[http://www.kstext.com/elearning/high_school/korhis/khpic/khpic33/p3329.jpg]]--[*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eneralcorp&logNo=220815878321|사진 링크가 삭제된 관계로 한 블로거 링크 첨부]]] >합당한 권한을 부여 받은 야심에 찬 칼란다리시빌리는 불복종에 대한 대응으로 신뢰할 만한 이르쿠츠크 연대에 의지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반혁명주의자들'로 신속하게 처리해버렸다. 블라고베쉔스크 인근 수라줴프카 마을에서 조지아 '권력층'의 지휘 하에 만행되어 블류헤르 인민혁명군 차기 총사령관에 의해 제지된 6월의 '아무르 대학살'로 인해, 트랴피씬 한인유격대의 범죄성을 도외시했던 현대 연구가의 과장된 정보에 따르면, 피살, 익사, 실종된 반란군은 400명 미만, 무장 해제되어 '반혁명군' 표시를 달고 러시아군에 전쟁 포로로 잡혀간 반란군은 900 명에 달했다. (54: 박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1917-30 년대 말). M., 이르쿠츠크, 상트페테르부르크, 1993. p.73-91 ) 또한 수 백명의 유격대원이 사망했으며, 한인사회는 [[사할린부대]]에 가해진 징벌에 분노하고 있다고 레닌에게 전해왔다. (55: 불다코프 V.P. 유토피아, 침략, 세력. 혁명 이후의 사회심리적 동향. 러시아, 1920-1930 년. M., 2012. p.601 )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 >[[https://cafe.naver.com/booheong/194250|부흥카페 제공]],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best&document_srl=3008795647|펨코 제공]] 결국 칼란다리쉬빌리는 1921년 6월 28일 [[사할린부대]]를 강제 진압해 무장해제시키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사망 36명''' 포로 964명 병자로 불참한자가 19명 박 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자 34명 기외 59명 행방불명이었다. 무장해제를 집행한 군대는 사자1명 29연대 사자 1명이었다. >----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 권희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36명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진압현장에는 사실 간도 독립군 대부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상술된 대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대다수가 이미 자유대대 쪽으로 합류한 뒤였기 때문이다. >임시군정의회는 계속해서 대한의용군에게 자유시로 와서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그리고 5월 19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합동민족연대의 병력 600여명이 자유시에 도착했다.584) 6월 6일 깔란다리쉬빌리가 까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은 깔란다리쉬빌리였고,두 명의 위원은 최고려와 [[유동열]]이었다. 극동비서부에서 전권위원으로 오홀라가 동행했다.그는 슈먀츠끼로부터 극동 공화국 총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위임받았다.585)이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자유대대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들은 군정의회를 중심으로한 통합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홍범도와 안무,최진동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高麗革命軍 교관으로 선임되었다.586) 그리고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 >즉 간도로부터 이동해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이제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했다. 이는 곧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한군사위원회의 권한을 부인한 것이었다.이로 인해 군정의회는 통합에 있어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쥘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동휘 및 한인부와 관계를 맺으며 자유시로 온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보고서 587)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이 자유시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 58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589)그러나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무엇보다 단일한 조직과 규율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590) 그리고 그 통합은 “不偏不義한 魯西亞 同志”를 사령관으 로 하는 “高麗革命軍政議會를 組織하야 軍事上에 關한 萬般을 指揮 統一케하”는 것이라고 했다.때문에 자기들은 “軍政議會의 本部와 某軍隊 駐屯地相距가 一百七八十里 되난지라 食料 及 諸般 供給에 對하야 運搬上 不便이莫大함으로 該軍隊를 軍政議會 近接 村落으로 移屯하라”는 군정의회의 명령이 정당함을 양해하고 “軍政議會 接近 村落에 移居”591)했다는 것이다. > >이로 보아 간도에서 옮겨온 무장부대들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간 것은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또한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명과 까자크 기병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간도의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해 무장부대 통합에 대한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또한 '''마자노프에 있던 [[사할린부대]]는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까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 즉 현장의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군대 병사들이었음"으로 사망자 중 간도독립군이 대부분인 것은 맞는데[*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6쪽)] 그 간도독립군인 '''허재욱의 의군부는 정작 전체 간도독립군 중에서는 소수였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 대부분의 간도독립군은 이미 수라젭카에 없었다. 그나마 사상자 수십명이 생긴 이유도 러시아어를 못 해서 소통을 못 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고 진압측도 별로 사상자를 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래 논문에서도 사상자는 '''수십명이라고 서술했다'''. 수백명 단위가 아니다. >아무리 화력의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지만 '''한편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할린부대]]측에서 적극적인 무력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앞서 살펴본 김재규의 회고도 동일한 맥락으로 읽힌다. 김재규는 이후 깔란다리쉬빌리로부터 “왜 기관총사격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없이 숨겨두었던 기관총 열쇠 4개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깔란다리쉬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들을 포로병으로 인정치 말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9)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640) 또한 '''군정의회측 또한 살상을 통해 무장해제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희생자는 거의 자유시수비대 29연대 병력들이 수행한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점도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앞서살펴보았듯이 피해자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부대원들이었다.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쪽 상해파 부대는 무장해제됐지만 현지의 관료들과 군인들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장해제 계획을 주도했던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상해파 부대에게 감동을 받아 무장해제를 반대하고 무기를 돌려주기까지 한 것이다.''' 이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대와 재무장한 한인 유격대는 주둔지의 현지인들을 상대로 폭력과 약탈을 일삼으므로 현지의 군인, 관료, 농민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김재규는 이후 깔란다리쉬빌리로부터 “왜 기관총사격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없이 숨겨두었던 기관총 열쇠 4개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깔란다리쉬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들을 포로병으로 인정치 말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9)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640'''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쪽 >칼란다리쉬빌리는 한국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부대를 가졌다. 그는 한국 민족의 팔자를 무겁게 이해하고 있었다. '''네스토르는 고국 해방에 대한 한국인 전투원들의 소중한 꿈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있었다.''' >---- >Жаргалова, Е. В. (2018). “ИСТОРИЯ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В ТОПОНИМИКЕ ГОРОДА УЛАН-УДЭ.”. 《Возможности развития краеведения и туризма Сибирского региона и сопредельных территорий》: 230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문서의 번역 재인용. >총사령관 귀하 >하바롭스크 1921년. > >한인의 폭동, 우리 부대에 의한 그들의 무장해제, 대포가 동원된 12시간의 전투 및 인민군 지휘간부 및 병사의 손실은 칼란다리시빌리 동무에게 아주 답답한 기분을 조성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지시들로 '''우리 지휘부의 조치에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주입한 칼란다리시빌리 동무는 폭도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를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대는 방탕, 약탈, 무자비한 폭력 같은 것에 몰두하였습니다.''' 결국에는 6월 29일 집회를 소집한 칼란다리시빌리는 제4사단장 파데예프 문제를 집회에서 다룰 것이라고 직통전화를 통해 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금 진압된 폭동이 칼란다리시빌리 동무 덕분에 다시 시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란다리시빌리 동무를 1년 이상 알면서 가끔 그와 함께 일한 우리는 그의 할동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한인부대를 무장해제하는 것이 우리 부대에겐 이미 두 번째 일입니다. '''그들의 재무장은 아무르 주민들이 이미 충분히 겪은 반란과 강도행위를 다시 야기할 것이며, 향후 자기 지역에서 칼란다리시빌리 부대 같은 것의 주둔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각 칼란다리시빌리를 제2군 사령부에 완전히 복종케 하거나 아니면 그를 군의 관할에서 완전히 제거하여, 그럼으로써 주민과 군이 폭동과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요청합니다.''' > >제2군 사령관 >군정치위원 >군참모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36~37 >칼란다리시빌리는 여전히 볼셰비키의 관심 대상이었던 한인의용대의 징계 임무를 수행했다. 1921년 1월 중순, 국경을 통과하는 모든 한인 유격대원들을 '일본 정탐꾼들이 침입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러 낼 것'을 요구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은 1921년 6월 29일 한인부대와 인민혁명군의 무장 충돌 소식을 듣고, 블류헤르 총사령관에게 계속해서 한인부대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58: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17. Op. 13. D. 288. L.6, 100 ) 외교인민위원회도 의견을 같이했다. 1921년 7월 초, 치체린은 중앙위원회 극동국에 한인부대 사건에 관한 세부사항을 전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들에게 신중하지 못한 분별없는 행동이 가해진 것은 분명하니,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 한인들이 극동 공화국에 있는 것은 불편한 일이나, 그들을 해산시킬 필요는 없으며, 그들이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르쿠츠크로 보내야 한다.”(59: 상동. F. 372. Op. 1. D. 87. L.153 ) 한편, '''한인부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1921 년 7 월 그들은 아무르주 체르니고프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요구하고, 마차를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머리를 겨누며 집에서 쫓아 내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한인을 '제 2 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60: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2. D.44. L.207, 213 ) >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